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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안톤 체홉의 갈매기라는 작품을 보았다.
포스터에는 뜨레뽈레프로 보이는 사람이 의자에 앉아 하늘로 향한 긴 총을 잡고선 고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때엔 갈매기의 내용을 자세하게 모를 때 여서 왠지 심오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설렘을 들고서 공연장으로 들어갔을 때, 대극장 속에 관객석과 무대가 같이 있는 모습이 아주 신기했다. 그 때 대극장이 이렇게 넓은 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막은 총 4막으로 되어있었고, 이 중에 갈등이 가장 돋보였던 건 역시나 응접실에서의 3막이 가장 돋보였다.
아르까지나의 억눌러왔던 쌓아왔던 고통,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육체적일지라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마음.
갈매기 속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외롭고 아픈 사람은 뜨레뽈레프보다는 아르까지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만큼 배우가 연기하기도 가장 어려운 역할이 아르까지나라고 생각한다.
대배우로써 엄마로써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앞에서는 눈물과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모습.
내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쏘린이 돈을 좀 달라고 했을 때, 아르까지나의 쌓아왔던 울분이 터져나와 자신은 돈이 없다고 하는 장면이었다. 그 부분에서는 아르까지나의 울분이 나에게도 전달되어 나도 모르게 그 부분에 울컥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 때까지 품위를 지키려 말은 못 했지만, 아르까지나의 남다른 슬픔.
그 장면에 처음으로 아르까지나가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에서도 나와있듯이, 안톤 체홉의 작품은 너무 다루기 어렵다고 연출이 말했다.
그 어려운 부분을 풀어나가고 풀어나간 부분을 관객이 마지막에 잘 정리 하는 것.
극 속에서는 니나가 갈매기라고 표현됐지만, 실질적으로 갈매기는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 즉, 극 속의 모든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아니 배우들뿐만 아니라 관객석에 앉아있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마지막에 뜨레뽈레프가 자살을 함으로써 뜨레뽈레프의 갈매기는 결국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자유를 얻지 못한 갈매기라고 생각한다.
그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아르까지나에게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단편적인 슬픔도 있겠지만, 관객에게는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당한 인물(갈매기)의 죽음은 우리 주위에도 많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대한 슬픔도 있겠다.
나의 주위 우리 주위 혹은 사회 주위를 살펴보면,
종종 이런 이야기가 있다.
더 슬픈 것은 이런 이야기는 계속 꾸준히 반복되고 반복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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