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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Ⅰ. 봄 밤의 꿈
Ⅱ. 마들렌 효과 (프로그램 구성에 관하여)
Ⅲ. 아!...임웅균! (마이크 사용의 문제)
Ⅳ. 동천과 이과수폭포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관한 의문)
Ⅴ. 다음날 아침에...
Ⅰ. 봄 밤의 꿈
봄비 내리는 그날 밤,
음악인들이 들려준 봄꽃이야기에
우리는 흠뻑 취했습니다.
축제의 현장에서 퍼져나간 음률은
홍매화 청매화를 활짝 피우고
잠든 목련꽃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3월 12일(木) 신춘음악회 이야기입니다.
“새봄을 맞아 가슴을 활짝 열어보자”는 표어 아래
문화예술을 통해 행복한 시민을 만드는 한마당이었지요.
삶의 복잡한 번뇌와 상념들이 무참히 쓰러지는 밤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음악회 MC였던
최선용님의 진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은갈색 구레나룻 수염은 붉은색 셔츠와 어울려 일품이었지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펼쳐졌습니다.
관현악, 타악기(마림바), 색소폰이 연주되었습니다.
또한 지상과 천상을 아울러 최고의 음악인 성악에서는
독창, 중창, 그리고 합창이 모두 마련되었지요.
중간 중간 MC의 정감어린 해설과 추임새는 흥을 더해주었고,
관객들은 순수한 어린애 마냥 호응하며
열정적인 갈채를 보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2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는데,
가히 커다란 상에 베풀어진 풍요로운 만찬과도 같았습니다.
하루하루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
예민해진 이성은 부드러워졌고
눌려있던 감성은 오랜만에 흥이 났습니다.
음악은 훌륭했고 우리는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작품에도 ‘옥 의 티’는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몇 가지 아쉬움을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흠결을 들추어 비난함이 아니라,
더 나은 발전을 위한 마음입니다.
또한 그날 밤의 즐거움을 훼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쉬움을 건드려 치워냄으로써
그날 밤의 감동을 완성하려는 뜻입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고 넓은 양해 바랍니다.
Ⅱ. 마들렌 효과 (프로그램 구성에 관하여)
“마들렌(Madeleine)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루스트(M.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것인데,
현재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과거의 추억이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들이키며
마들렌(과자의 이름)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즉, 이 촉감을 통해
잊고 있었던 옛날의 경험이
달콤하게 피어오르며 행복에 젖게 됩니다.
프랑스의 문인 조르주 뿔레(G. Poulet)는
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추억의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 찾아온 하늘의 축복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과도 같은
초자연적인 역할을 한다.”
또 기독교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이를 가리켜 “상기(想起 : anamnesis)의 힘”이라 했습니다.
즉, 아름답고 소중했던 추억을 상기시킴으로써
삶의 기쁨을 느끼며
자기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깨닫고
생의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음악의 힘은
마들렌 부스러기 보다 훨씬 더 강렬합니다.
익숙하고 정겨운 음악을 듣는 순간
그 음악과 관련된 아름다운 시절과 사랑하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시절을 회상하며
하늘이 주는 진한 행복을 누립니다.
이쯤 되면
심지어 아픈 추억마저도
애틋하게 승화되어 그립고 소중해 집니다.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세상을 헤쳐 나갈
크나큰 근원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힘, 예술의 의미 아닐까요?
그래서 음악을 영혼의 비타민이라 하지요?
바로 익숙하고 정겨운 음악은 이런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마들렌효과’를 자극할 수 있는 음악이
이 시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다음 두 가지 아쉬움이 생각났습니다.
첫째, 우리 귀에 익숙하고 정겨운 음악이 부족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가곡의 경우, 목련화는 시의 적절했는데
다른 곡들은 너무 생소하여 공감이 부족했습니다.
외국 곡의 경우,
생소했어도 선율의 정서가 우리 민족과 맞아서
정감을 느끼게 한 곡 ( 러시아민요 ) 도 있었고,
낯선 곡이어도 화려한 기교를 통해
멋진 환상을 선사한 곡 ( 롯시니곡 ) 도 좋았습니다.
소프라노 오은경의 새로운 발견도 반가웠습니다.
한편 너무 알려져 진부하고 계절에 다소 맞지 않는
느낌을 주는 곡 ( 돌아오라 소렌토로 ) 도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마음을 확 잡아끄는 곡이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감성이 확 솟구치지 못하고 머뭇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참 어렵고도 미묘합니다.
사람마다 각자 취향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또한 새로운 곡을 통해
예술적 자극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 절묘한 균형점과 최대한의 공통분모를
잘 잡도록 고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우리가 즐겁고 행복하자고 음악회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둘째, 마들렌 효과를 위해서는 악기 연주보다
성악에 더 비중을 크게 두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성악의 분량이 적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관객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장 절실히 와 닿는 음악은 성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교감할 수 있고,
누구나 어느 정도는 해 본 경험을 갖고 있으며,
또한 즉석에서 혹은 공연장 문을 나서면서
바로 흉내내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번 공연의 주인공은 임웅균교수 아니었나요?
포스터만 봐도 이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인공이
정감어린 노래 두 세곡 추가했으면
훨씬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입니다.
Ⅲ. 아!...임웅균! (마이크 사용의 문제)
이 부분은 어쩌면,
관객들이 무심결에 넘겼을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므로 꼭 짚어보고 싶습니다.
처음에 저는 무대에 세워진 시커먼 두 다리가
녹음용 마이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리 증폭을 위한
마이크(Mike; Microphone; 확성기; 증폭기)였습니다.
물론 성능은 대단히 좋아서
음을 찢어 놓거나 과도하게 확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아~아~ 그러나,
우리의 감동은 그 마이크로 인해 현저히 줄었습니다.
왜 마이크를 사용했나요?
성악가들의 요구였나요?
그렇다면 거절하고 말렸어야지요.
임웅균교수가 먼저 요구했나요?
만일 그랬다면, “그의 시대는 갔다!”라고 선언하고 싶습니다.
아니라면, 주최 측의 제안이었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친절한 금자씨(상대를 망치는 결과를 낳는 친절함)”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날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함으로써,
커다란 증폭된 소리는 있었지만 감동적인 찬란한 포효는 없었으며,
뚜렷한 저음은 있었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여린 음을 없었습니다.
마치 가수를 앞에 두고 함께 CD로 노래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클래식 성악가의 노래를 듣고자 하는 가장 으뜸가는 목적은
그의 육성을 그대로 접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목소리를 기반으로 수십년 동안 갈고 다듬어
깊고 그윽하게 쌓아올린 소리의 내공을 느끼고자 함입니다.
바람 없는 실내에서
성악가의 훈련된 깊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와
공기를 진동시켜 우리 귀에 와 닿게 되면
그 소리의 질감과 입체감이 그대로 전달되어 느껴집니다.
실크같이 부드럽게도 하고 삼베처럼 거칠기도 하며,
물처럼 미끈하기도 하고 기름처럼 끈적거리기도 하며,
가는 봄비처럼 여리기도 하고 맹수처럼 거세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우리 몸 속으로 흘러들어와 구석구석 퍼지면서,
그 여러 느낌들이 복합적으로 조화롭게 얽혀서
진한 울림과 잔잔한 여운으로 아련히 지속됩니다.
이 때 바로 전율할 듯한 감동이 솟아오릅니다.
바로 황홀감입니다.
삶의 기쁨을 한 차원 높이는 즐거운 체험이지요.
이것을 두고 바로 플라톤이,
“음악은 인간의 영혼 속으로 파고든다.”라고 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성악가의 소리가 마이크 속으로 들어간 다음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는 순간,
인간은 사라지고 기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는 인간의 음성을
기계적인 전기 신호로 변환시키는 장치입니다.
음성이 기계적 진동으로 변하고,
그것이 스피커를 통해 크게 확장되어
음향 에너지로 사람들의 귀에 전달됩니다.
이 과정에서,
곡진한(曲盡:간곡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성악가의 음성은
사라져 버리고
기계적 조작음이 크게 크게 울려 퍼질 뿐입니다.
원래 음성이 지녔던 질감과 입체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 밋밋한 비닐 촉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요컨대 마이크는 큰소리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예술적 감흥을 전하는 매개체는 못됩니다.
그날 마이크의 사용으로 분명 감동은 확 줄었습니다.
정글 속에서 살아있는 호랑이의 생생한 울부짖음을 듣고자 했는데,
동물원그림책을 보면서 녹음된 호랑이 울음을 듣는 격이었습니다.
청정바다에서 바로 건져올린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느끼고자 했는데,
통조림에 담긴 조미료 듬뿍 친 삶은 생선을 만난 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직접 만나 손이며 얼굴을 만지고 싶었는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안타까이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이번 공연이 대중가요 공연이었습니까?
팝페라(Popera)가수의 공연이었나요?
아니면 무대가 팔마경기장 이었나요?
그렇다면 마이크를 사용했어야지요.
하지만,
임웅균이 이승철이었나요? 임형주였나요?
아니었습니다.
임웅균은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 테너 임웅균, 그 자신이었습니다.
물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회관 대극장의 규모가 크고
음향 전달조건이 최고의 상태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관객이 많으면 더 어려워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성으로, 마이크 없이, 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노래하는 순간
관객들은 초정밀의 정적 속에서 온갖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성악가의 크고 웅장한 소리부터 미세하고 가는 호흡까지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숱한 성악가들이 그리 해 왔습니다.
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리톤 이재환, 소프라노 김영미,
소프라노 나혜윤, 바리톤 김동규,
테너 김남두, 테너 엄정행, 메조소프라노 김학남.....
그들은 각자 자기의 성량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마이크 없이 곡진한 노래로 우리를 감동 시켰습니다.
또 오래전, 지금은 없어진 순천시민회관 무대에서
악조건의 큰 홀을 쩡쩡울리던 (베이스)바리톤 고성현을 기억합니다.
임웅균교수도 오래전 순천에 왔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제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심지어 아마추어 성악가의 경우에도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발표회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혹, 작년말 송년음악회에 왔던 같은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에
근무하는 김영미교수가 임웅균 교수에게 충고했던 것일까요?
“휴... 순천가신다고요?
그때 분위기는 참 좋았는데, 노래하기는 참 힘들었어요.
마이크 사용하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라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이크로 소리를 만들어 낸다면
순천에도 얼마든지 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대가들의 얼굴 한번 보자고 초빙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것은 결코 아이들 학예발표회가 아닙니다.
재미와 통쾌함도 좋지만,
감동과 여운을 더 원합니다.
우리는 이것에 항상 목말라합니다.
기계적 소리는 싫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음반, CD, MP3등 너무 많이 널려있습니다.
우리는 원형질의 인간의 목소리 그대로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 영혼의 교감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클래식 성악가에게는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임웅균교수는 스스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요처럼 (마이크 이용해 기교로만) 노래하면
일천곡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클래식 성악은 그렇지 않다.”
맞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한 곡을 듣기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이크와 스피커 없이,
예술가의 살아있는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그 한곡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리만큼 강력히 의견을 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마이크 사용이 성악가들에게 관례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 시민들과 우리의 아이들에게 진정한 예술의 맛과 멋을
느끼고 누릴 수 있게 해주어야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동시에 성악가 자신들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좋을 이유가 없기때문입니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어조가 강해진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힐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 것임을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Ⅳ. 동천과 이과수폭포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관한 의문)
합창도 좋았고 래퍼토리도 멋졌습니다.
저에게 특히 ‘딜라일라’는
앞에 얘기한 마들렌 효과를 극대화시켰습니다.
오랜만에 학창시절로 달려가서 풋풋한 추억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대규모 합창단과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연주에서
자주 드는 의문이 이번에도 또 생겼습니다.
즉, 시종일관 너무 강한 음이 경쟁하듯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도 그렇고, 합창도 그렇습니다.
천둥소리는 있는데, 세미한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와 같은 거대한 소리는 있는데,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의 졸졸거림은 없습니다.
이과수폭포의 거센 물줄기는 있는데,
순천을 감싸고도는 동천과 같은 정겨운 소리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항상 이렇게 우렁차고 강해야만 하는지 의문입니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사전에 충분한 연습으로 곡과 가사를 소화하고,
함께 모여 리허설을 또 충분히 한다면 가능하리라 봅니다.
소리의 양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어울림을
훨씬 더 달콤하게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요?
뛰어난 목수는 못을 박을 때에
계속 강하게만 두들기지 않는다 합니다.
때론 거세게 때론 약하게 해야 정확히 깊숙이 잘 박힌다 합니다.
권투에서도 상대방을 K.O. 시키기 위해서는
강펀치를 계속 날리기 보다는
중간 중간에 약한 펀치를 섞어야 한다 합니다.
음악은 더욱 그렇지 않을 까요?
그날 밤,
활화산 같은 거센 불기둥이 우리의 귀에 마구마구 쏟아지는 바람에,
미쳐 가슴 속에 따뜻한 촛불하나 켜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고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서두에서 밝혔듯이
지금까지의 얘기는 단지 ‘옥의 티’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천상에서 노래할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제왕 카라얀의 베를린 필도,
전설의 윤학원의 대우합창단도,
옥의 티는 있었습니다.
그날 공연,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했습니다.
즐겁고 정겨운 봄맞이 축제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미 훌륭하므로 좀 더 욕심을 내 본 것뿐입니다.
Ⅴ. 다음날 아침에...
조선시대 문인 이인문(李寅文 : 1745 ~ 1821)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街人花底簧千舌 (가인화저황천설)”
“어여쁜 사람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음악을 듣는다.”
그날 밤
우리는 봄 꽃피는 밤에
천 가지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습니다.
즐거움과 감동에 감사드립니다.
양지와 음지에서 수고한 모든 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또한 순천시와 문화예술회관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수준 높은 관객의 모습을 보여준 시민들께도 감탄을 보냅니다.
다음날 아침
어제 밤과 같이 봄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요.
아파트 화단을 보니 매화꽃이 만개하고 있었습니다.
또 이곳 저곳 백목련 가지 위에는
어린 아기의 꼭 쥔 주먹손 같은 소담스런 목련꽃이
불쑥불쑥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꽃들도
전날 밤 울려 퍼진
그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요?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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